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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조견(1351~1425)
고려 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초명은 윤으로 고려왕조가 망하자 조견은 통곡하고 두류산에 은거 하였다. 태조가 공의 재능을 아껴 탁용하려 하자 이름을 견이라 고치고, 자를 종견이라 고칠 정도로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컸다. 뒤에 청계산으로 옮겼는데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송경을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해서 그 봉우리를 망경대라 했다 한다. 죽은 후 태조는 평간의 시호를 내리고 둔촌에 장사 지내게 하였는데 둔촌은 고려 충신들의 절개를 후세에 전한 곳이기도 하다. 묘비에는 그의 유언에 의해「조견지묘」라는 네 글자만이 있을 뿐 관직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서견
이천 사람으로 공양왕 4년 장령이 되어 여러 간관들이 함께 조준, 정도전, 남은의 죄상을 밝히었는데, 정몽주가 죽음을 당하게 되자 일당으로 지목되어 귀양을 갔다. 고려가 멸망하자 서견은 금양(시흥)에 살면서 북녘을 향해 앉는 일이 없었으며, 종신토록 한양성을 마주하지 않았다 한다.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끝까지 마음을 고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대단하다 할 수 있다. 금천(시흥)의 번당(현 서울 성남고교 자리)에 서견의 묘가 있는데 선조 때에 충신의 묘로 봉해졌으며, 1938년 의왕시 포일동 산 82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