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청계산에 숨어있던 고려유신

청계산에 숨어 있던 고려 유신

청계산에 숨어 있던 고려 유신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현 과천시 막계동)에는 명악인 관악과 마주 선 청계산이 있다. 청계산의 옛 이름은 청룡산으로 이 산정에는 청룡이 승천했다고 전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정에 석대가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망천대이다. 망천은 원래 만경(萬景)이라 하여 산정석대에 오르면 눈아래에 만경이 전개된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으나 고려말을 지나 죽촌망혜(竹村芒鞋)로 초라한 선비 한 사람이 이 만경대에 오른 후에 만경이 망천으로 이름까지 바뀌었으니 이 행색이 초라한 선비야말로 고려왕조의 최후를 몸소 겪고 고려왕조의 송도를 탈출하여 망명의 길을 떠났던 고려충신의 한 사람인 조윤(1374-1429)이었다.

조윤은 고려왕조를 빛낸 이름난 선비요 중신으로 두문동(杜門洞) 72인 중의 한명이었다. 고려의 신하이던 이방원이 고려왕조의 충신 포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자 지금까지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하던 이름난 신하들은 신라시대부터 깊이 뿌리박힌 '열녀는 두명의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를 부르짖고 일어났으니 먼저 청계사에 들어있던 이색을 위시하여 조견, 길재 등이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성계는 소원을 이루어 왕위에는 올랐으나 신하 없는 왕이었고 백성이 따르지 않는 초라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단지 그에게는 정도전, 조준, 배극염 등의 신하 몇 명이 따를 뿐이었다. 문무의 이름난 신하들은 두문동으로 삿갓을 쓰고 사라지고 백성들은 이성계를 욕하며 천시하고 고려의 서울 송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아연실색한 이성계는 포은을 죽인 것을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조선의 개국이래 처음으로 내란을 일으킨 것도 정도전이었다.

즉 정도전은 태조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의안군 방석을 세자로 봉하고자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 모든 왕자를 모살하려다가 발각이 되어 정안대군에게 죽었으니 이것이 곧 조선조 제1차의 난인 정도전난이다.

이성계는 궁여지책으로 시험을 치러 인재를 구하기로 하고 널리 과거통문을 냈으나 문무에 응시한 것은 시골뜨기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려의 신하들의 뒤를 쫓았으나 하나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색이 초청을 받고 궁에 들자 이성계는 나아가 맞아 들였으나 왕좌에 오르는 것을 본 이색은, "옛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찾음이요, 형에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러 찾아 왔음은 아니노라" 한마디를 남기고 물러났고 명신 길재는 조선조가 부여한 '박사'호도 물리치고 입궁도 않은 채 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하여 입산한다는 편지만 전하고 사라졌다.

김자수 또한 대여섯번의 초청에 못이기어 사당에 들어 최후를 고하고 음독자살로 이성계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마지막으로 불린 것이 바로 조윤이었으니 그는 자기의 이름이 조선조의 공신록에 오른 것을 실소하며 "이는 형이 아우를 아낌이 아니라 아우를 욕함이 크외다." 하고 이성계에 붙은 형을 조롱하고서 이성계가 준 호조판서의 벼슬을 반환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견(胤)으로 고치고, 자를 종견이라 했으니, 나라와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니 '개와 같다'함이었다.

"아우 조종견은 물러가오. 형은 역신의 영화를 길이길이 누리시오" 이렇게 형과 조선왕조를 버린 조윤은 광주의 깊은 산을 찾아 헤매며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골짜기에서 골짝으로 개의 울음소리를 피하여 어느 높은 봉에 오르니 이 곳이 바로 청계산이다.

산정에서 굽어보니 때마침 단풍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나라와 임금을 잃고 죽을 자리를 찾아 다니는 조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지는 못했으니 멀리 송경에 사무친 정은 통곡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는 오직 나라를 잃고 임금을 잃고도 죽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 아 내 어찌 죽지 못하노" 이렇게 서울 송도를 바라보며 울고 울다 쓰러져 자고 하기를 또 수십번,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도 조윤의 슬픔에 동정하여 만경대(萬景臺)를 망경대(望京臺)라 부르게 되었다.

조윤이 청계산정에 들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이태조는 그의 충절에 깊이 감동하고 그 충절을 조선왕조로 돌려보기 위해 친히 청계산으로 조윤을 찾아 왕조로 돌아오기를 권하기 여러번 하였으나, 조윤은 멀리 송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조윤의 마음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달은 이성계는 "우리 왕조에는 역신이나 그 뜻이 장한지고" 한마디를 남기고 쓸쓸히 돌아갔다. 돌아가서는 그대로 조윤을 못잊어 산정에 초막을 짓게 하여 비를 피하게 하였으나 조윤은 그 초막이 보기 싫다하여 또 다시 청계산을 떠나 양주 깊은 산으로 발을 옮기었다.

이 초막이 있던 자리가 오늘의 망경대다.

컨텐츠 라이센스

공공누리: 출처표시 (제1유형)자세히보기

의왕시청이 창작한 저작권 보호분야 {청계산에 숨어있던 고려유신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공공누리 공공자작물 자유이용허락

담당자 정보

콘텐츠 관리부서 : 문화체육과 문화예술관광팀  김병창 ☎ 031-345-2533 최종수정일 : 2017-02-25

만족도 조사 및 의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하십니까?
평점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