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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이동(二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의 창촌·징계리·신촌·교동·동동·묘동·궁말·신기촌이었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이리로 되었으며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이리로 되었고, 광복이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이리로 개칭되었고,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이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이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이동으로 변경되었다. 이동에는 징계골 뒤에 있었던 덕성봉(德成峯 )에서 발원하여 상학골 웃말을 거쳐, 아랫말·창말을 지나 왕송저수지에 합류되었던 용정개울에 어류가 많아 이곳 주민들이 천렵을 했으므로 '어엽리'라 불렀다. 이동에는 가나무골·구래·궁말·금천말·상학골·새터마을·징계골·창말 등의 자연취락이 있다.

자연취락명일반지명

  • 가나무골(柯木洞)
    부곡역앞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감의 주산지였을 만큼 집집마다 감나무가 있어 가지마다 많은 감이 열렸다. 가나무골은 1700년대에 여주 이씨 후손중에 이봉조(李鳳朝)란 선비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인데, 그 후 1979년 서울 남부화물기지 건설로 인해 대부분의 지역이 철거 되었다.
  • 구래
    궁말과 군포시 당정동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화성군 남양·서신에서 한양을 가자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할 만큼 교통의 요충지여서 행려자(行旅者)의 발길이 끊이질 않아 주막이 번창했었다. 그 후 노정이 다른곳으로 분산되자 주막은 광복을 전후로 해서 자취를 감추었고 민가라고는 2가구 밖에 없다.
  • 궁말(宮村)
    전주 이씨 덕흥대군파의 종가를 도정궁(都正宮)이라 부르고 있는데, 덕흥대원군 후손중에 이해승(李海昇)이란 분이 조선 말엽에 이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았다 하여 도정궁의 '궁(宮)'자를 따서 '궁말(宮村)'이라 부르고 있다. 새터마을 서쪽에 자리잡은 이 마을은 소설가 이무영(李無影 1908∼1960)씨가 1939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그의 절친한 친구 이 흡이 살고 있던 이곳으로 이주한 후 10여년간 농민들과 생활하면서 농경의 현장에 깊이 참여하여 그 실질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쓴 《궁촌기》를 비롯, 《제1과 제1장》, 《흙의 노예》 등의 농민소설을 집필했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 금천말(錦川洞)
    새터마을 남쪽에 있다. 이 마을은 의왕역 서편에 철도청 조차장(操車場)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곳에 살던 53가구 중 50가구를 당시 시흥군 주선으로 현재의 위치에 집단 이주케하여 취락이 형성되었다. 금천말이란 마을 명칭은 삼동 아랫 장안말 출신 신종균씨가 이 마을 동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이 맑은 비단 물결같으므로 그 인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천말(錦川洞)'이라고 작명한 것이다.
  • 상학골(校洞)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교동이라 불렀던 마을로 징계골 북쪽에 있다. 이곳은 이 마을 동쪽에 조선시대에 향교가 있었으므로 '상학교'이라 부르고 있다. 상학골은 함양 박씨와 동래 정씨의 오랜 세거지로 마을 북쪽 지역은 '양지말', 서쪽지역은 '아랫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1979년까지만 해도 덕성봉 및 꽃동네에 있던 당집에서 해마다 음력 10월2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 새터마을(新基村)
    묘막말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 말엽에 청주 한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신기촌이라 불렀다. 1979년 서울남부화물기지 건설로 이곳 일대가 구획정리 되었다.
  • 징계골(澄溪谷)
    이 마을뒤에 있는 산에서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마을 앞으로 흐른다고 하여 '징계골'이라 하였다. 조선 말엽에 함양박씨가 처음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징계리라 불렀다.
  • 창말(倉村)
    금천말 옆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조선 중엽에 창고가 있었다 하여 '창말'이라 부르고 있는데, 조선 숙종때 이조참판을 역임한 한성우란 분이 낙향하여 처음 세거한 곳이다. 한성우는 송시열의 문하로 청렴 정직하기로 유명햇던 사람이다. 그가 살던 집 주위를 인줄로 쳐 놓아 일반 시민들은 접근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창말에는 앞서 말한 한성우의 묘를 비롯하여 한 장석·한필교·한원이·한창수등의 묘소가 있으며 마을에서는 1979년까지만 해도 덕성봉 및 꽃동네에 있는 당집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 강사간들(江沙間坪)
    문등산 북쪽에 있는 들로, 조선 말엽에 이곳에 저수압을 설치하면서부터 '강사간들'이라 불렀다.
  • 구래고개
    군포시와 의왕시 경계에 있는 고개로 구래와 군포시 당동사이를 연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양·서신 사람들이 안양·과천·서울을 가자면 반드시 이 고개 길을 이용했을 만큼 중요한 곳이었는데, 현재는 농로로 이용될 뿐이다.
  • 길마바위
    오봉산의 5개 봉우리중 넷째 봉우리 남쪽에 있다. 길마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이다.
  • 덕성봉터(德星峯址)
    징계골과 수원시 이목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던 산으로, 이동 주민들이 이산 기슭에서 매년 음력 10월 2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그러나 1979년 서울남부화물기지 건설로 없어졌다.
  • 묘막말터(墓幕村址)
    오봉역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 조선조 고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김병학의 묘막(墓幕 99칸)이 있었으므로 그 인근을 '묘막말'이라 불렀는데, 1979년 서울남부화물기지 건설로 폐동되었다.
  • 문등산(文等山)
    창말 뒤에 있는 산으로, 본래는 음성 박씨 선대의 소유였으나 조선중엽에 이르러 숙종때 이조참판을 역임한 한성우란 분이 창말에 낙향, 세거하면서부터 '문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청주한씨는 대대로 문과 출신의 가문이다.
  • 영정개울
    옛 덕성봉에서 발원하여 상학골을 거쳐 창말을 지나 왕곡저수지에 합류되는 하천을 말한다. 예전에는 이 개울에서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하여 이리 전역을 '어렵리'라 불렀다.
  • 이리교(二里橋)
    금천마을 입구에 있으며, 다리의 길이 18m, 폭 8m로 1977년 12월 10일 준공되었다.
  • 제상바위
    오봉산 남쪽 하단에 있다. 제사 때 제물을 벌여 놓기 위하여 만든 제상처럼 생긴 바위이다.
  • 치마바위
    오봉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산 중턱에 있다. 바위의 형상이 치마처럼 생겼다.
  • 헌터골
    강사간들 안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시대에 이곳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헌터골'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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