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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박성삼(1886~?)

광주 학현(현 의왕시 학의동) 출신의 의병이다. 대한제국 군인을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군대가 해산된 이후 의병장 윤치장 의병부대에 참가했다. 1907년 11월 20일경 의왕 청계산에서 일본 순사대와 교전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하는 한편 1908년 2월경까지 경기도 각 지역에서 의병을 위한 군량미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08년 11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형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희승(1896~1989)

광주 의곡면 양지편마을(현 의왕시 포일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이다. 1932년 조선어학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여 간사 및 간사장과 이사를 지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참여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되었는데, 일제는 한글사전 편찬 및 한글 보급운동이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 하여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했다. 징역 2년 6개월을 언도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 직후인 8월 17일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성주복(1894~1971)

광주 의곡면 청계(현 의왕시 청계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숭례문[남대문]을 지나 종로까지 나아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법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독립을 선언’하고자 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장래에도 독립운동에 참가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정부에서는 2005년 8월 15일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이봉근(1893~1938)

광주 의곡면 청계(현 의왕시 청계동) 출신으로 3.1운동 때 의왕면사무소 앞 독립만세운동 지도자이다. 3.1운동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고향 친구 성주복의 영향을 받아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1주일 동안 만세시위에 필요한 태극기를 제작하고, 마을 주민들을 조직하여 1919년 3월 31일 밤 의왕면사무소에 집결했다. 시위대는 800여 명에 달했으며, 횃불을 들고 태극기를 흔들며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를 오가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지휘하던 이봉근은 일본군 보병이 쏜 총에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수원경찰서에서 태형 60~90대의 즉결처분을 받았다. 이후 마을에서 야학 또는 서당을 열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문맹퇴치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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